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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 과학

요소 유기 화합물의 합성

by ()!~!# 2021. 12. 19.

인류는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자연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물질들을 이용하고 발전시켜 왔습니다. 주술사, 약제사, 의사 그리고 연금술사와 화학자들은 처음에는 자연에서 나오는 물질을 그대로 이용하다가 점차로 우연히 그 제조법을 발견해 합성물질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점점 많은 물질들이 발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만들어지게 되면서 과학자들은 체계적인 물질 분류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학자들의 물질 분류의 시도는 17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물질 분류 과정에서 자연 상태에서 발견되는 것뿐만이 아니라 인위적인 합성으로 만들어진 유기물의 다양함과 방대함은 유기화학을 독자적인 학문 영역으로 만들었고, 광범위한 영역에서 우리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 주었습니다. 특히 19세기에 유기합성화학은 가장 두드러진 발전을 하였고, 수천 가지의 유기화합물이 합성되었습니다. 이런 발전은 실용 화학의 창시자라고 여겨지는 리비히의 공헌에 의한 것입니다.

 

유기화합물 연구를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것을 분류할 분석법이 나와야 했습니다. 최초로 분석을 시도한 사람은 라부아지에지만, 그것을 표준적인 조작으로 완성한 사람은 리비히였습니다. 리비히는 연구를 거듭한 끝에 당시의 유기화합물의 정량적 분석방법을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리비히는 혈액, 담즙, 오줌 등 여러 체액을 분석하였고, 우리 몸의 에너지원이 탄수화물이나 지방이라는 것도 규명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농업에 화학비료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식량의 대량 생산을 이루었고, 이로 인해 독일의 화학비료산업은 엄청난 팽창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독일 최초의 화학교육자였스빈다. 당시 화학의 중심지는 프랑스였습니다. 리비히는 프랑스로 유학하여 게이 뤼삭의 조수로 화학 공부를 하였습니다. 1824년 리비히는 독일 기센 대학으로 돌아와 새로운 방법과 정렬로 새로운 화학실험실을 갖추고 노력한 경과 유럽의 화학 중심지는 독일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화학이 활발히 연구되는 분위기에서 뵐러는 최초로 유기화합물을 합성해내었습니다. 1828년 뵐러는 무기화합물인 시안산암모늄에서 유기화합물인 요소를 생성하였습니다. 요소의 합성은 유기화학 분야의 새 장을 여는 것으로, 당시 거의 모든 과학자들이 믿고 있었던 생기론이 옳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생기론이란 유기화합물은 생명이 있는 생물의 조직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며, 인공적으로 원소를 가지고 합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뵐러의 스승인 베르셀리우스와 뒤마, 리비히 등 많은 학자들이 뵐러의 요소 합성을 호의적으로 평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생기론의 소멸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뵐러 자신도 생기론에 대한 믿음을 부정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주된 이유는 요소를 합성하기 위해 처음 반응시킨 물질이 동물에서 얻어낸 유기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853년, 뵐러의 요소 합성이 성공한 지 25년 후 베르틀로가 글리세린과 지방산의 합성에 성공합으로써 유기화합물의 합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베르틀로는 메틸알코올, 에틸알코올, 메탄, 벤젠, 아세틸렌 등을 차례로 합성하였고, 이로써 유기화합물은 반드시 생명력이 있어야 한다는 이전의 생기론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그리하여 유기화학이란 탄소화합물을 취급하는 화학으로 정식 제안되었습니다.

 

이후 유기합성화학은 유기염료의 합성으로 또 한 차례의 전기를 마련합니다. 최초의 유기염료는 15살에 런던 왕립화학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퍼킨에 의해서 만들어졌습니다. 1856년의 어느 날 18세의 퍼킨은 콜타르에서 얻은 값싼 원료로부터 키니네를 합성할 가능성이 있다는 그의 스승 호프만의 말을 듣고 이를 실행해 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만약 이것이 가능하다면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적도지방에서 키니네를 수입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입니다.

 

키니네 합성 실험은 성공하지 못했고, 대신 그는 호프만이 학생시절에 콜타르에서 얻어낸 아닐린을 이용한 실험으로 자주색의 아닐린 염료인 모브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는 1857년 아닐린 염료공장을 차려 아닐린 퍼플이라는 이름으로 시판하였습니다. 특히 프랑스에서 이 염료는 모브라는 이름으로 크게 인기를 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리하여 불과 몇 년 사이에 천연염료는 값싸고 편리하며 다양한 빛깔을 가진 새로운 합성염료로 대체되었습니다. 퍼킨이 처음 작은 공장 규모로 시작한 염료 생산은 곧 영구과 프랑스로 퍼져나갔습니다. 이렇게 급속도로 발전한 염료 산업은 유기합성화학공업 발전의 실마리가 되었습니다. 또한 염료 제조에 필요하였던 황산의 공급은 중화학공업의 발전을 촉진시켰고, 유기염료가 유기질 세포에 선택적으로 흡수된다는 사실에서 화학을 의학에 활용한 화학요법이 창안되었습니다.

 

또한 작은 유기분자들이 수없이 연결되어 거대 분자가 되는 고분자 화학이 발달하여 합성수지, 합성섬유, 합성곰, 등의 재료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염료 산업에 장기적인 투자를 했던 듀퐁사에서 최초의 합성 섬유인 나일론을 만들어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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